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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집으로 가는 길

동네 길목마다 삼삼오오 모여 동그라미 그리며 버스를 기다린다. 키가 훌쩍 자란 고등학생, 여드름 송송 돋은 중학생, 잠시도 가만히 서있지 못하는 초등학생들이 옹기종기 버섯처럼 모여있다. 아빠 손 잡고 형과 누나 전송하러 나온 꼬마들은 눈을 비비며 신바람이 났다. 유모차에 아기 싣고 온 식구가 총출동한 가족까지 등장한다. 아기 안고 기다리는 엄마 얼굴은 아침 햇살 받아 홍조를 뛴다. 샛노란 개나리꽃 색깔의 버스 문이 열리자, 형 따라 버스에 오르려던 세살배기 아이는 아빠가 손을 잡아 끌어내리자 앙 울음을 터트린다.     아! 해방이다. 부모에게는 길고 긴, 아이들에게 짧은 여름 방학이 끝나고 드디어 학교로 돌아가는 날이다. 아이들은 친구 다시 만나 즐겁고 부모는 긴 여름 동안 애들과 씨름하며 부대낀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어 대환영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날! ‘누이 좋고 매부 좋고’란 말은 구전설화로 암행어사 박문수가 가난한 오누이를 도와 나란히 혼례를 치르게 하는 이야기다.     어느 날 박문수가 가난한 오누이 집에서 저녁을 얻어 먹었는데 가세가 기울어 내일이면 정혼한 처녀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다고 슬퍼했다. 이야기를 들은 박문수는 지략으로 도령을 장가 들게 도와주고, 처녀와 하례를 치르기로 한 신랑은 누이와 짝 지어 남매 둘을 혼인시킨다. 일거양득, 꿩 먹고 알 먹는 이야기다.   우리 동네가 ‘Back To School’로 분주해서 연락했더니 딸이 사는 뉴저지는 다음 주부터 학교가 시작한다고 했다. 곧이어 새 옷 샤핑하며 모델처럼 비비꼬며 폼 재는 손녀 사진이 텍스트로 날아온다. 할머니 체면에 못 본 척 할 수 없어 금일봉을 전달한다. 딸 사위 아들 며느리에 손주가 넷이니 일년 동안 할러데이와 기념일, 생일 등 기억할 날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 쌈짓돈마저 마를 지경이다. 달력에 빼곡히 적어놓는데 어쩌다 놓치면 할미 노릇 못하는 어미로 추락한다.     딸은 레이쳘레이쇼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방송에 출연하며 승승장구했는데 둘째를 낳은 뒤 아이 키우는 전업주부의 길을 택했다. 한 점 후회 없이, 정성을 다해 얼마나 열심히 키우는지 엄마 노릇 대충한 내가 부끄러울 정도다.     우리 아이 셋은 할머니가 애지중지 정성을 다해 키웠다. 상록회 어른들 모임에서 성경공부하고 찬양연습이 끝나면 부리나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부엌 식탁에 알록달록 좋아하는 간식과 과일 담아놓고 아이들의 노란 버스를 기다렸다. 개나리꽃 버스에서 내린 애들은 빛의 속도로 달려와 할머니 품에 안긴다. 할머니는 해바라기처럼 큰 미소로 아이들을 맞는다. 학교로 가는 길은 희망을 안고 달리는 꿈 길이다. 집으로 오는 길은 사랑이 넘치는, 꿀이 담긴 귀향이다. 옛날 옛적에 보따리 가방을 매고 꼬불꼬불 좁은 시골 길 따라 학교에 갔다. 동무들과 재밌게 놀면서도 집으로 가는 시간을 기다렸다. 비가 오면 어머니는 비닐 우산 쓰고 측백나무가 보초를 선 학교 앞에서 날 업고 집으로 갔다.     꼬부랑길 따라 달려 갈 때면 빈 양은 도시락 안에서 젓가락이 달그락거렸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머니 젖무덤처럼 편안하고 행복했다. 수양버들나무에 묶인 그네와 짚으로 엮은 사립문이 보이면 가슴이 콩닥거렸다. 달려가 하얀 소복 입은 어머니 품에 안기면 보름달처럼 환하게 안도의 숨을 쉰다. 딸의 염색체가 나를 건너뛰고 할머니를 닮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자식은 사랑과 정성으로 자란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개나리꽃 버스 할머니 체면 개나리꽃 색깔

2023-08-22

[이 아침에] 할머니는 아무나 되나

딸이 보낸 다섯 살짜리 손녀 사진을 멍때리며 바라본다. 너무 귀엽고 예쁘다. 사지를 이리 비꼬고 저리 틀며 폼재는 모습이 여간한 모델 뺨친다. 이번에 손녀는 유치원, 손자는 유아원에 입학하는데 온 집안이 경사 난 듯 난리법석이다. 할머니 체면에 가만 있을 수 없어 등교하는 날 입을 손자 손녀 옷값을 보냈다. 손녀딸이 제 옷을 여러 벌 골라서 내가 보낸 돈이 바닥나 손자 옷은 못 샀다고 딸이 울상이다. 이럴 때는 눈 꼭 감고 “네 자식은 네가 알아서 하세요”라고 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손자 옷값을 더 보낸다.     요즘 어린아이들은 애가 아니다. 어른 뺨치는 애 어른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옷을 스스로 고른다. 자기 맘에 안 들면  ‘NO!’ 고집이 철통이다. 좋게 말하면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를 고양하는 것이지만 세상살이 제 마음대로 골라 살 수 없는 때가 그 애들의 인생에도 닥친다는 것.     어릴 적에 새 옷은 추석 명절이나 설날에 입었다. 스무 가구가 조금 넘는 마을에서 새 옷 입는 아이는 술 만들어 파는 면장집 아들과 우리 남매 뿐이었다. 대구에 사는 외숙모가 보내준 알록달록한 실로 짠 예쁜 스웨터를 입었다. 해진 옷은 깁고 때 묻은 옷을 개천에 빨아 놋쇠다리미로 다린 빳빳한 저고리를 입고 등교하는 날은 너무 신나서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개울 건너 학교에 갔다. 가슴에 달린 하얀 손수건이 실바람에 나비처럼 나부꼈다. ‘손주는 올 때 반갑고 갈 때도 좋다’는 말은 정말 사실이다. 이리 뛰고 저리 설치며 혼을 빼고 별의별 온갖 것들을 다 물어대는 데는 척척박사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온 지도 얼마 안 되는데 가는 날 동그라미 친 달력을 딸 몰래 훔쳐본다.     우리 애들은 ‘할머니’라는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고인다. 어머님이 세 아이를 기르셨다. 둘째 딸 산후조리 도와주러 미국에 오셨다가 학교 다니며 사업하는 딸이 불쌍해 눌러앉으셔서 타국 땅에 묻히셨다. ‘할머니’라는 단어는 우리 아이들에겐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내는 ‘원더우먼’이고 언제든지 뛰어가 품에 안기고 기댈 수 있는 ‘늘푸른 느티나무’다.     ‘아흔 셋,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취업준비 하며 보내던 어느 날, 나의 가족이자 오랜 친구인 할머니가 먼 곳으로 떠나려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다큐멘터리 ‘할머니의 먼 집’ 중에서     무서우면 할머니를 가장 먼저 찾던 아이, 할머니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를 가장 좋아하던 아이, 이소현 감독은 할머니를 그냥 보낼 수 없어 “내가 영화 열심히 찍을 테니까 다 보고 돌아가셔, 그 전에 돌아가시면 안 돼”라며 곁을 지킨다.     웃음이 많고 넘어져도 피가 난 채로 주무시던 할머니. 더 이상 먹이고 키울 손주도 없어 화초를 키우지만 발치 가까이 온 고독을 견디지 못해 할머니는 죽음의 강을 스스로 건너기로 작정한다. 전 재산 30만원을 화장대에 두고 수면제를 모아 생을 마감하려 했던 할머니는 ‘사는 게 성가셔’ 라고 말씀하신다.   나이 먹는다고, 손주가 여럿 생긴다고 아무나 할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할머니’라는 단어에는 인내와 희생, 고귀한 연륜이 목화꽃송이처럼 실타래로 묶여있다. 어머니의 사랑이 피와 살을 깎는 정성이라면 할머니 사랑은 오래 된 정원에서 피어나는 향기로 생의 곳곳에서 사랑의 밧줄을 감아올린다.   이기희 / Q7 Fine Art 대표·작가이 아침에 할머니 할머니 사랑 할머니 체면 아이 할머니

2022-10-02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할머니는 아무나 되나

딸이 보낸 다섯 살짜리 손녀 사진를 멍 때리며 바라본다. 너무 귀엽고 예쁘다. 사지를 이리 비꼬고 저리 틀며 폼 재는 모습이 여간한 모델 뺨친다. 이번에 손녀는 유치원, 손자는 유아원에 입학하는데 온 집안이 경사난 듯 난리법석이다. 할머니 체면에 가만 있을 수 없어 등교하는 날 입을 손자 손녀 옷값을 보냈다. 손녀 딸이 제 옷을 여러벌 골라서 내가 보낸 돈이 바닥 나서 손자 옷은 못샀다고 딸이 울상이다. 이럴 때는 눈 꼭 감고 “니 자식은 니가 알아서 하세요”라고 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손자 옷값을 더 보낸다.     요즘 어린아이들은 애가 아니다. 어른 뺨치는 애 어른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옷을 스스로 고른다. 자기 맘에 안 들면  ‘NO!’ 고집이 철통이다. 좋게 말하면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를 고양시키는 것이지만 세상살이 제맘대로 골라 살 수 없는 때가 그 애들의 인생에도 닥친다는 것.     어릴 적에 새 옷은 추석 명절이나 설날에 입었다. 스무 가구가 조금 넘는 마을에서 새 옷 입는 아이는 술 만들어 파는 면장집 아들과 우리 남매 뿐이였다. 대구에 사는 외속모가 보내준 알록달록한 실로 짠 예쁜 스웨터를 입었다. 해진 옷은 깁고 때묻은 옷을 개천에 빨아 놋쇠다리미로 다린 빳빳한 저고리를 입고 등교하는 날은 너무 신나서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개울 건너 학교에 갔다. 가슴에 달린 하얀 손수건이 실바람에 나비처럼 나부꼈다.   ‘손주는 올 때 반갑고 갈 때도 좋다’는 정말 사실이다. 이리 뛰고 저리 설치며 혼을 빼고 별의별 온갖 것들을 다 물어대는데는 척척박사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온 지도 얼마 안 되는데 가는 날 동그라미 친 달력을 딸 몰래 훔쳐본다.     우리 애들은 ‘할머니’라는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고인다. 어머님이 세 아이를 기르셨다. 둘 째 딸 산후조리 도와주러 미국에 오셨다가 학교 다니며 사업하는 딸이 불쌍해 눌러 앉으셔서 타국 땅에 묻히셨다. ‘할머니’라는 단어는 우리 아이들에겐 무엇이던 척척 만들어내는 ‘원더우먼’이고 언제던지 뛰어가 품에 안기고 기댈 수 있는 ‘늘푸른 느티나무’다.     ‘아흔 셋,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가 자살을 시도했다. 취업준비 하며 보내던 어느 날, 나의 가족이자 오랜 친구인 할머니가 먼곳으로 떠나려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다큐멘터리 ‘할머니의 먼 집’ 중에서     무서우면 할머니를 가장 먼저 찿던 아이, 할머니가 해주는 옛날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던 아이, 이소현감독은 할머니를 그냥 보낼 수 없어 “내가 영화 열심히 찍을 테니까 다 보고 돌아가셔, 그 전에 돌아가시면 안돼”라며 곁을 지킨다.     웃음이 많고 넘어져도 피가 난 채로 주무시던 할머니. 더 이상 먹이고 키울 손주도 없어 화초를 키우지만 발치 가까이 온 고독을 견디지 못해 할머니는 죽음의 강을 스스로 건너기로 작정한다. 전 재산 30만원을 화장대에 두고 수면제를 모아 생을 마감하려 했던 할머니는 ‘사는 게 성가셔’ 라고 말씀하신다.   나이 먹는다고, 손주가 여럿 생긴다고 아무나 할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할머니’라는 단어에는 인내와 희생, 고귀한 연륜이 목화꽃송이처럼 실타래로 묶여있다. 어머니의 사랑이 피와 살을 깎는 정성이라면 할머니 사랑은 오래 된 정원에서 피어나는 향기로 생의 곳곳에서 사랑의 밧줄을 감아올린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할머니 할머니 사랑 할머니 체면 아이 할머니

202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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